주제 : 개똥철학

  • 내 인생 가치관이 통째로 바뀌었던 경험이 있나요? 어떠한 일로 그렇게 변했는지 상황을 알려주세요.
  • 내 소중한 사람에게 3가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묘비에 어떤 한 마디를 남기고 싶나요?

죽음 앞에선다면

당장 눈앞에 자신의 죽음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 우리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추구할까?

우리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대게 죽음을 예측하지 않는다. 예측가능한 상황들을 늘 염두해 두지만 결코 자신의 죽음을 그날 미리 인지하고 행동을 계획하거나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체가 또 정신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리라고 믿으며, 삶을 만들어내는 신체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나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둔다면 욕망과 신체를 비롯해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가능성, 예측가능성이 무용지물이 된다. 행동을 상실하면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나의 기능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아닐까.

망막병증

2020년 초였다. 1월에는 코로나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전세계의 정세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양적완화 발표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전세계의 주가들은 예상이나 한것처럼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트럼프 정부에서는 코로나 대비책으로 거의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했으며 시장 전체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3월 즈음. 하루아침에 왼쪽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왼쪽 눈 중앙부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전날 피곤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눈이 침침하다 느끼긴했었는데 자고일어나니 검은 구멍이 뚤려있었다. 눈을 뜨자 마자 당황했고, 시선을 옮기자 그 검은 구멍이 시선을 따라왔다. 구멍의 크기는 1미터 앞 사람의 얼굴을 전부 가리는 정도의 크기였다.

병원을 찾아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망막이 혈관장애로 인해 망막에서 벌어진 상황이었고, 얘기를 들어보니 증상이 심하지 않은경우 3개월이면 자연치유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병원에서 이 얘기를 듣고 상당히 안심했었지만. 이 병변은 1년이지난 시점에도 좀처럼 잘 회복되지 않았고, 현재 까지 7번도 넘는 재발이 일어났다. 

병원에서 말하길 이 질병은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지만 1년이상 변병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망막 시신경에 변성이 생겨 영구적으로 시력이 손실되는 경우가 발생하니, 되도록 잠을 많이 자고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1년반째 됐을무렵.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만가지 생각이 들게 되었는데, 필자는 그 이전까지 교육업에서 10년이상 종사해오던 사람이었다. 수학교육전공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학교에도 학원에도 교육회사로도 직업을 바꿔가며 일을 해보았지만 역시 가장 만족도가 높은 순간은 학생들을 마주하고 가르칠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건 몸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망가지면 내가 이전에 해왔던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도 젊은사람처럼 몸을 혹사해서인지, 한쪽눈이 망가지면서 남은 한쪽눈도 조금씩 좋지않다는 느낌을 받아왔고, 시력을 잃기전처럼 침침한 상태를 여러번 경험하자, 앞으로 시각장애인의 삶을 산다고 생각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던 일을 모두 때려치우고 회복에 전념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시각을 잃어버릴것만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천정만을 바라보던때가 유난히 기억에 남아있다. 정신은 깨어있지만 이전에 갖고 있던 삶의 연속선상에 있던 모든 가능성을 마음에서 져버려야 했던 그 시간. 일종의 죽지않는 죽음을 경험한게 아닐까. 살아오면서 잘 후회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막심하게 후회되는게 하나 있었다. 

30년 이상의 삶에서 뭐가 남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그 시점에서 이전에 내가 누려왔던 행복이나 행복을 만들어주었던 사람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삶이라는 여정을 경험하게 해줄 몸의 기능을 하나 둘 점차 잃어버리는 과정속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 

그때 가장 후회되는건, 30년 이상의 세월동안 뭘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를 지탱해주던 자신감을 갖게만들어주던 맥락적의미들이 있었다. 내가 속해있는 집단을 기준으로 평범하고 소소하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것들을 말한다. 나는 그 평범하고 소소한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자 하였다. 20대 중반부터 해내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난 그렇게 비범한 인간이 아니어서 평범하게 회사다니고 소소하게 연애하고 진심을 담은 취미활동 공동체에서 핵심멤버로서 기능 하면서, 그렇게 부대끼고 어울어가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신체 기능정지의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건, 내가 뭘 해왔냐는 것이었다. 나라고 부르는 모든것이 사라진다면 남아있는것은 아무것도 남지않는다. 책한권 쓰지 않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낸것도 아니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을 만들어낸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한점이 찍혔다 사라지는 그런것은 아니었을까. 너무 아깝다.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 인생에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글을 쓰고,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 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남겨 내가 죽어도 작동하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삶이 이전에 살아왔던것처럼 소소하지만 마음이 충만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산자의 말과 죽은자의 글

우리 몸에는 여러가지 기관들이 있다. 그 중에 말을 듣는 귀가 있고, 말을 하는 입이 있다. 이 두가지 기능을 욕망을 기반으로 대비시키면 꽤 재밌는 해석이 나온다. 입은 자신의 욕망이 나타나는 기관이며, 귀는 타자의 욕망을 수용하는 기관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의 감정적 근간에 욕망이 내제되어있다. 그런면에서 말과 글 모두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욕망을 잘 포장할수록, 말이 정교할수록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강해지며 화자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특히 글은 말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 말은 화자의 노동력이 매번 요구되는 점이고, 글은 최초의 한번을 제외한다면 더이상 노동력 없이도 반영구적으로 영향력을 재생산할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면에서 산자의 말과 글은 화자의 욕망을 대변해주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죽은자의 글은 어떨까? 죽은자의 글에서 죽은자의 욕망은 살아있는 자에게 당사자 대 당사자로서 어떠한 영향력도 없다. 죽은자의 글이 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욕망을 내비치는 방법이 아니라, 온전히 그들을 위한 정보와 관념을 제공하는것에 있으며 저자의 욕망의 실체인 신체가 없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나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정보를 취할 수 있다. 즉, 죽은 자의 글은 욕망보다 애정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죽은 저자가 의도한것과 전혀 다르게 대리보충되며 새로운 해석을 사용한다고 말해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작활동은 때때로 나의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